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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의 비유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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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안전함을 자각하는 과정


우리는 왜 쉽게 이원의 환상에 빠지는 걸까?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설정이라도 우리의 기본적인 욕구는 몰입하는 쪽이다. 예를 들면 영화를 보거나 만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때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재미있기를 바란다. 몰입해서 참여하고자 하는 의도가 바탕에 깔려 있다. 그래서 이야기에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설정이 엉성하다면 불만을 갖게 된다.


분명 그것이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재미를 위해서는 깊게 몰입하고 싶다. 영화를 보는데 부스럭거림이나 음식 냄새가 방해하면 화면 속에 있다가 밖으로 튕겨져 나온다. 극장이란 환경이 영화의 내용과는 이질감이 있기 때문에 흥미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몰입도는 낮아지고 현실 자각 타임이 쉽게 찾아온다. 그러나 VR 헤드셋 같이 몰입도가 높은 매체라면, 그리고 그런 매체를 태어날 때부터 쓰기로 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영화가 즐거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알고 스스로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즐거운 영화도 그렇고 공포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안전하다는 자각이 없다면 그때부터는 오락이 아니라 죽고 사는 실전의 문제가 된다. 공포영화에서 느꼈던 스릴은 더 이상 짜릿한 쾌감이 아니라 공포라는 고통의 장르로 넘어가 버린다. 우리의 삶이 이와 같다.



비상탈출구를 안내해 드립니다.


깨달음은 스스로 원래부터 안전했음을 자각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측면에서 보면 어떻게 삶(영화)을 재미있게 즐길 것인가에 대한 솔루션이다. 마음을 치유하라거나 죽어서 천국 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신통력을 길러주는 것도 아니다. 그 모든 것들은 스크린 위에 떠 있는 영화의 내용이다. 영상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 모든 것들이 실체가 없는 스크린 위의 환영과 같으니, 빨리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알려주는 것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이고 경전의 내용이다. 물론 그런 가르침조차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다만 영화 시작 전에 상영되는 비상 탈출구 안내 영상이라는 점만 다를 뿐.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는 증거는 도처에 깔려 있다. 시간을 갑자기 건너뛴다거나 빌딩에서 떨어져도 멀쩡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늘을 날아다니기까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몰입이 가능하다. 그보다 더하게는 움직이는 그림을 보고 울고 웃기도 한다. 가짜에 몰입할 수 있는 것도 신기한 재주라면 재주다. 가끔 영사기가 고장 나 블랙아웃이 생기는 시스템적인 허점도 벌어진다. 이런 경우는 집단적인 깨어남이 일어나야 마땅하지만 대부분은 그럴 만한 준비가 돼 있지 못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로 실체가 없다는 증거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증거가 없어서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관의 예서처럼 증거가 아무리 많아도 가짜를 진짜처럼 즐기는 이원의식 때문에 실체관념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 재주의 핵심은 무엇이든 의식으로 움켜잡는 버릇이다. 모양을 움켜쥐고 그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습성이다.


영화 속의 내용이 아닌 것을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영화 속에 등장한 모습이라면 그것은 무조건 이원성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이원성으로 드러나는 것은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로 존재하는 듯 보이는 모든 것들은 그것 아닌 것들에 의지해 모습으로 드러났다. 이 말은 의지하는 것도 의지를 당하는 것도 모두 개별적인 개체가 아니라 하나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분리로 보는 모든 것들은 사실 개별적인 존재성이 없어서, 눈으로는 뻔히 분리된 것으로 보이고 만질 수 있다고 해도 무지개 같은 환상일 뿐이다. 억지로 환상으로 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을 일러주는 것이 석가모니의 연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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