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인간은 기계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전원이다. 배터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곤란하니 인간을 수면상태로 캡슐에 가둬두고 꿈을 꾸게 한다. 만들어진 꿈은 사람들에게는 실제 세상이다. 불교의 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여러 모로 참 걸작이다.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은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 약과 파란 약을 건네며 선택을 요구하는 장면이다.
결국 빨간 약을 선택하고 깨어난 네오는 이미 깨어있던 동료들과 함께 기계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위해 싸워나간다는 이야기다. 캡슐에 누워있던 누군가는 끔찍한 현실보다는 계속 꿈속에 있기를 원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영화는 기계로부터의 해방 즉 깨어남을 목표로 설정하고 숨 가쁘게 달려간다.
네오는 자신이 한 번 깨어난 세상이 의심의 여지없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다. 여기서 생각을 조금 더 확장하자면, 이미 한 번 깨어난 경험이 있는 네오가 거기서 탐구를 끝낼 리가 없다. 기계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역시 꿈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장자의 호접몽처럼,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 것인지 장자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 네오 역시 그런 의문을 품고 진짜 현실을 찾아 끊임없이 의심하고 확인하는 방법을 찾아서 탐구의 길을 가는 것을 상상해 본다.
영화 인셉션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제가 등장한다. 사람들의 꿈속에 침투해 그들의 무의식을 조작한다는 내용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루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들의 갈등이 그려진다. 꿈을 깬 건지 아니면 아직도 꿈속인지 알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는 점이 두 영화에서 다루는 문제의 시작이다. 영화에서는 토템이라는 아이템을 상징적인 툴로 등장시키지만 사실 그 또한 설정일 뿐 실상 꿈속에 등장하는 토템이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 역할을 할 수는 없다. 그저 영화적 장치였을 뿐.
인셉션의 결론은 어땠을까? 콘서트에서 목이 쉰 가수가 관객에게 마이크를 넘기듯, 감독은 마지막 장면의 결론을 관객의 상상력의 몫으로 남겨둔다. 주인공의 토템이었던 손팽이가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비틀거릴 때 영화는 암전 된다. 쓰러졌다면 현실이고 계속 돌았다면 꿈이다. 비틀거리기는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으므로 누구도 그것이 아직 꿈속이었는지 아니면 현실이었는지 알 수 없다. 이 부분이 사실 이 영화가 멋짐의 상태로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두 영화 모두 공통적으로 까다로운 질문을 하나 마음속에 남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진짜 현실인가? 매일 아침 눈 뜨고 마주하는 하루가 최종적인 현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또 한 번 깨어나야 할 꿈이 아니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쉽게 내린 결론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살아간다. 너무나 현실적이라서 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은 진실이라고...
문득 우리 앞에 모피어스가 나타나 파란 약과 빨간약을 건넨다고 해도, 우리의 현실이 너무 현실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상대조차 하지 않고 피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일단 무섭게 생겼으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이 최종인지 아닌지 알게 해주는 그런 알약은 정말 없을까? 영화적 상상력으로 등장한 알약이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깨어남의 과정에서 그 알약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깨어남의 역사에 있어서 실제로 이러한 과정이 있긴 했었다. 약물을 통해 깨달음의 상태(?)에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70년대 자유주의 히피문화와 함께 급속도로 퍼졌던 LSD와 같은 약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한 성분들을 이용해 의식의 변성상태를 유도하는 방법인데, 현재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런 약물들이 금지됐고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넷플릭스 시리즈 '마음을 바꾸는 방법'을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런데 이런 접근 방법은 깨어남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탕에 깔려있으므로 바른 방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깨어남을 위해 들어가야 할 특별한 정신 상태라는 건 따로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비이원의 실상이 반쪼가리라는 말은 대충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런 알약이 아니라 네오의 선택이다. 끝까지 가보겠다는 네오의 선택은 우리의 공부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실상을 마주하겠다는 선택, 그것이 바로 공부에 있어서 모피어스의 알약인 셈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이 결국 관심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관심과 의문은 이 탐구의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관심과 의문의 동기는 다양하겠지만, 애초부터 깨어남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오해로 접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동기라고 해도 관심과 의문이 일어났다면 활활 타오를 준비를 마친 장작더미와 같다. 불이 붙으면 그러한 오해와 불순한 동기는 그대로 타버리게 될 테니 아무 문제없다. 물론 바른 가리킴을 따라갔을 때 이야기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여정의 시작은 목적지를 잘 못 알고 출발하는 여행과 같다.
한 번 깨어났던 네오라면 언젠가는 또다시 현실에 대한 의문이 새로운 탐구로 이끌지도 모르겠다. 아직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당신도 이미 손에는 빨간약이 놓여 있을 테니 네오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아직은 삼키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 있겠지만 일단 선택은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파란 약을 원하는 사람이 이런 글을 읽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