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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지 않아서 더 위험한

7월 8일

3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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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정보의 접근성이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깨어남의 정보가 널리 퍼진 적은 없었다. 유튜브만 해도 수많은 정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 못지않게 위험성도 존재한다. 어찌 보면 그 모든 정보들은 지뢰와 같다. 잘못 밟으면 터진다. 삶이 통째로 날아간다.


느낌상 비율로 치자면 80%는 장르가 비슷하지만 핵심이 다르고, 19%는 방향은 맞지만 방법이 잘못됐으며, 1% 미만 만이 바른 길을 안내한다. 안목이 없다면 그것을 만나기는 눈감고 바늘귀에 실을 꿰기보다 어렵다.


예를 들어 명상은 그 자체로는 눈을 뜨는 것과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잘못 이해되는 주제 중 하나다. 물론 심리적 안정과 삶의 유틸리티로 활용하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상관없다.


명상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눈을 뜨지 못한다.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명상이란 걸 시도했었다. 뭔지 모르지만 일단 그쪽에 뭔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와, 그동안 봐왔던 모습, 즉 다리를 꼬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 행위가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본 게임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마터면 엉뚱한 곳으로 빠질 뻔했다. 다 몰라서 벌어지는 일이다.





몸으로 하는 다른 수행이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요가, 염불, 참선 역시 모두 눈을 뜨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뭐라고? 적어도 염불과 참선은 불교에서 강조하는 핵심 공부방법이 아닌가? 이런 오해 탓에 불교 안에서도 눈을 뜬 사람이 많지 않다.


어떤 시도를 하든지 간에 우리가 믿을 수 있고 믿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이성이다. 그 외에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동물들은 깨달을 수 없다. 깨달을 필요도 없겠지만, '필요'라는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의식의 발달이 미흡하다.


만일 이성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미신에 빠지고 점을 보러 다니고 신비한 것에 자꾸 관심이 간다면, 정신 차리고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사는 게 우선이다. 생명은 물 웅덩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믿는 의식 수준이라면 쉽지 않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같은 의식 수준의 과정을 어깨동무하며 지나고 있지 않다. 누군가는 신화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고, 누군가는 초극단으로 이성이 발달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의식 상태에서도 각각 깨어남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발현되는 양상은 사뭇 다르며 때로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가장 건강한 깨어남은 충분히 이성이 발달한 가운데서 발현된다. 이것을 힌트로, 지뢰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가진 강력한 무기인 이성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다.


무엇으로부터 눈을 뜨는가? 우리가 눈을 뜨는 것은 잘못된 스스로의 착각으로부터 눈을 뜨는 것이다. 구속이라고 생각했던 그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본성, 즉 한없는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말은 회복이라고 했지만 잃은 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착각으로 사는 동안은 꿈속에 빠져있는 것과 같다. 우리가 꾸는 꿈은 이원적인 착각의 꿈이다. 꿈은 언제나 허구로서의 흔적을 남긴다. 대표적으로 변한다는 흔적을 남긴다.


만일 내가 변한다면 나는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다. 내가 변화를 인식한다는 것은 내가 변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으로서의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시절을 돌아보면 거기에는 ‘나’라는 삶을 조용히 관조하는 변하지 않는 그것이 있었다. 몸은 자라고 생각도 바뀌지만 바뀌지 않는 것이 있다. 만일 그것마저 변했다면 우리는 변화를 인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큰 대전제만 놓치지 않으면 엉뚱한 길로 빠지 지거나 지뢰를 밟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구의 말도 쉽게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큰 힌트를 남기고 돌아간 바 없이 돌아갔다.  


당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허물 벗은 뱀 껍질처럼 알맹이가 없다. 아무리 많은 것을 얻고 아무리 찬란한 영광을 맞이하더라도,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이 다 착각이다. 이런 과격한 말을 그냥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나 역시 그냥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런 건너뛰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략한다. 이것은 그냥 결론이다. 각자가 확인해야 하는 결론이다. 단지 누군가 왜 깨달아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때 해줄 수 있는 말 정도다.


눈을 뜨면 그때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 그 과정은 이원적 이성을 근간으로 촘촘하게 사유하고, 그 사유 방식의 습득으로 이원적 사유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어쩌다 문득 자각이 강해지며 깨달았다는 착각을 하더라도 근본적인 인식의 패턴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뿐이다.


단순히 마음이 편해지고자 한다면 명상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이 궁극적으로 당신의 번뇌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우리의 인식 구조를 그대로 두고 내면으로 파고들어 가기 때문에 그렇다. 들어갔던 깊은 의식은 결국 다시 나와서 삶을 살아야 한다. 언제까지 모래더미에 머리를 숨기며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깨어남은 삶을 위한 것이고, 삶이 없다면 깨달음도 필요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개체적인 삶에 국한된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원래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다. 아무리 재주를 부려도 결코 벗어나지 못할 만큼 대단한 존재다. 손오공이 근두운을 타고 아무리 멀리 가려해도 언제나 부처님 손바닥인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은 그것이 손오공의 손바닥이라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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