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안다는 것
동전의 양면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한 번에 한쪽 면 밖에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그 뒷면이 항상 있음을 안다. 그래서 동전을 정확히 인식하는 제대로 된 방법은 보이는 한쪽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동전에 양면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아는 것이다. 이것이 통찰이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를 설명하는 부분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리, 코, 눈, 꼬리의 느낌 등... 모든 것이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인식할 때 비로소 정확하게 코끼리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이원성은 이렇게 코끼리를 부위별로 개별적으로 만지는 것과 같고 비이원성은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원성은 세상이 드러나는 기본 구조다. 자동적으로 분리를 하고 부분적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원성의 본질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망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은 인간의 의식이 선과 악, 즉 이원적으로 분화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메타포다. 이것을 이야기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신화적 의식 단계에서 벌어지는 난센스다. 이원성은 너와 나를 분리하여 부끄러움을 알게 하고 그 표면적 다름에 매몰되어 선과 악을 다른 것으로 보도록 한다.
있다 vs 없다
이원성의 끝판왕은 '있다'라는 관념과 '없다'라는 관념이다. 즉 모든 이원적 물음은 '있다'와 '없다'로 모아진다. 동전의 양면과 같이 '있다'와 '없다'는 서로 의존하는 개념으로서 다른 하나 없이는 스스로 성립하지 못한다. 동전과 마찬가지로 어떤 현상적 대상을 인식할 때 가장 제대로 인식하는 방법은 그 둘을 함께 인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가 있다고 할 때 사과가 없음도 같이 보아야 비로소 사과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과가 있으면서 없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우리의 인식은 이런 비이원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없는 거지 있으면서 없는 건 뭐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분리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앞서 말한 통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다. 통찰은 우리의 시각정보만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불완전한 감각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 사유를 통해 지혜에 도달하는 의식의 전환이다. 즉, 생각 방식의 이해가 아니다. 생각 자체는 이원적 구조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답이 되지 못한다. 이것은 대부분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흑과 백의 비유
흑과 백의 비유를 통하면 이해가 좀 쉽다. 흑은 백으로 인해서 드러난다. 백이 없이는 흑이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백의 받쳐줌이 없이는 흑 스스로 드러나고 인식될 방법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드러난다는 말은 그 무엇이 바로 존재의 원인 혹은 조건이라는 말과 같다.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의 본질은 바로 그 원인과 조건과 다름이 아니다. 그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존재라는 것도 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의미의 한 측면이 아니라 나와 세상의 본질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포인트다. 이것을 제대로 탐구하면 '나'라는 것의 개별적 존재성이 사라지고 전체성이 드러난다.
흑이 스스로 드러날 수 없다면 흑은 무엇인가? 백이 없이 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흑은 과연 흑이라고 할 수 있는가? 흑과 백이 서로를 드러나게 할 때만 서로 인식이 된다. 마치 샴쌍둥이처럼 어느 하나의 부재를 상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흑은 무엇인가? 흑과 백이 경계는 드러나지만 본질적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 흑이 홀로 스스로 존재성이 없다면 흑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지만 모습은 드러나있다. 모습은 드러나 있지만 개별적 존재성이 없다. 흑은 흑이 아님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흑과 흑 아님의 본질적 차별은 없어진다.
통찰을 통해 얻는 것
나는 나 아님에 의해서만 드러남이 가능하다. 나는 나 아님과 다르지 않다. 나와 나 아님의 경계는 분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이원성을 증명한다. 이원성은 드러남의 관점의 표현이고 비이원성은 본질의 표현이다.
사과가 존재한다면 사과는 썩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을 것이다. 사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눈앞에 보이지도 않을 것이며 만져지지도 않을 것이다. 사과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말은 비유나 말장난이 아니라 이원의 언어를 이용해 비이원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원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비이원의 통찰이 자리 잡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연기법, 즉 연기적인 사유를 통해서 이원적 의식을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이 이성의 영역이 성숙한 인간 진화의 다음 단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먹고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이원이고 비이원이고 그런 게 무슨 사치스러운 취미냐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의 뿌리를 해결하고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힌트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것이며, 비로소 내가 나로서 진짜 세상을 맞이하는 뜻깊은 일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런 글은 써놓고 보면 참 추상적이고 어렵게 읽힌다. 사실은 그렇게 어렵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고 매우 구체적인고 경험적이다. 사과 맛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사과의 맛을 보는 것은 매우 쉬운 것과 마찬가지다.
혹시라도 이런 글을 읽고 신비한 상상을 하게될까 걱정되지만, 사실 알고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꼭 기억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