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적 구조와근원적 불안
우리의 의식은 모양을 움켜쥐는 습성이 있다. 모양을 대상으로 움켜쥐는 반복적인 작용이 대상을 실체화하는 쪽으로 고도화되었다. 무엇이든 덩어리 진 것처럼 보이면 그런 것이 존재한다고 간주한다. 그룹 짓기와 개념 짓기다. 그룹을 짓고 개념을 짓는 이런 능력 덕분에 개념의 개념인 수학이 발달하고, 논리와 과학이 발달하면서 세계의 모습을 바꿔 놓는다.
신화의 시대를 거쳐 이성의 시대를 지나며 우리가 이룬 성과는 자랑스러울 만하다. 마치 멋지게 쌓아 올린 레고 블록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우리의 자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죽음이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되면 불안감과 의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한다. 여전히 삶이 무엇인지 모르고,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안타깝게도 남은 시간은 점점 줄어만 간다. 나이 숫자만큼 시간의 속도도 빨라진다.
불안은 이성의 시대를 맞이한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이다. 분리된 대극으로 인식하는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분리에 따른 갈등과 불만족은 늘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갈등 구조의 본질에 대해 켄 윌버는 이렇게 말한다.
‘아담이 배운 당혹스러운 사실은 모든 경계선은 또한 잠정적인 전선(戰線)이라는 점, 따라서 하나의 경계를 긋는 것은 곧 스스로 갈등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죽음에 대항하는 삶, 고통에 대항하는 쾌락, 악에 대항하는 선의 괴로운 투쟁 등이 더욱 그러했다. 너무 늦게 알게 되었지만, 아담이 배운 것은 “어디에 선을 그을 것인가?”는 실제로 “어디서 전쟁이 일어날 것인가?”를 의미할 뿐이라는 것이다.’
- 《무경계》, 켄 윌버, 김철수 저
사실 아담이 이 갈등 구조를 늦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단지 순차적인 과정일 뿐이다. 일단은 이성의 발달로 이원적 의식이 고도화되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과 갈등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일어나고, 그 원인이 이원성의 갈등 구조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다. 원숭이가 깨달을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까 우리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문제를 갖고 다음의 도약을 꿈꾸고 있는 중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선각자들이 너무 빨랐다. 대중들의 의식 수준과는 다르게 너무 빠르게 깨달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깨닫게 하는 게 그토록 어려웠던 것이다. 가르침이 이어지더라도 대부분 오해되기 일쑤고, 그런 오해는 필연적으로 각자의 의식 수준에 맞춰 해석되고 받아들여지게 되는 탓이다. 석가모니가 아무리 ‘자등명 법등명’을 외치고 죽어도 그 후손들이 불상을 세우고 신격화, 대상화에 몰입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는 정확하게 반대로 가는 길이다.
** 자등명 법등명 : 석가모니가 죽기 전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남긴 말이다. 스승이 없으면 어디에 의지해 수행을 해야 할지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진리와 스스로에게 의지해 공부를 지어가라 했다.
이원성의 구조 자체가 허상임을 자각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스스로 자유로워지기 위해 다음 스텝으로 약속된 당연한 순서다. 그 해결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연기법을 통해 우리의 이원적 관점을 넘어서는 것이다.
땅에서 넘어진 자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보조국사 지눌의 말이다. 이원성 때문에 우리의 고민이 시작됐다면 그 이원성을 딛고 일어서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괴로움을 주는 이원 의식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도구다. 생각을 버리고 멍 때리며 마음의 평안을 구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이미 갖추고 있는 이성의 능력을 이용해 현실을 바라보면, 세상이 실체가 없다는 증거가 여기저기 발견된다. 증거가 없어서 실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어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가짜를 진짜처럼 즐기는 이원 의식이 진실의 눈을 가려버린다. 이 가림막이 이원적 실체 관념이다. 모양을 의식으로 움켜쥐고 그것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바로 이원적 실체 관념이다. 우리의 의식은 덩어리 진 모양을 실체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움켜잡으려 한다.
이렇게 실감 나고 생생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 환상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겠지만 아무리 선명하고 아무리 생생해도 실상이 아닌 것은 실상이 아니다. 꿈의 구조와 생시의 구조는 정확히 똑같다. 꿈과는 달리 그 생생함이 매일 이어진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지속 시간의 길고 짧음이 존재와 비존재를 나누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은 이전 글에서 살펴봤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고민하더라도 모든 것은 이원성의 틀 안에서 펼쳐지는 환영과 같은 드라마다.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든 것이 연기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연기적으로 드러났다는 말은 그것에 고유한 실체가 없이 그것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그것 아닌 다른 것들 역시 또 그것 아닌 다른 것들로 인해 생겨났을 뿐, 아무리 찾아봐도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석가모니가 얘기한 ‘무아’의 의미이며, 이것은 나만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세상에 나타난 모든 것들은 존재성(자체성)이 없다는 의미다. ‘무아’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좀 더 바람직한 가르침으로는 ‘제법무아’, 즉 나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이 존재성이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으로 ‘법등명’하고, 이 글을 끝까지 읽은 스스로를 믿으며 ‘자등명’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