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50이 넘으니 머리가 많이 가늘어졌다. 예전엔 머리카락이 너무 두껍고 참 싫었는데 이제는 너무 가늘어 볼륨이 살지 않는다. 피부가 지성이라 언제나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흘렀는데, 이제는 너무 건조해서 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피부가 퍼석퍼석하다. 새벽 2시에 일어나서 배고프다고 과자를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어도 아침에는 멀쩡했었는데, 이제는 눈이 퉁퉁 붓는다. 남들은 왜 늙지 않느냐며 인사치레를 하지만 정작 속으로는 충분히 늙고 있다. 덩치가 작고 직업상 옷차림이 자유로워서 남들보다 어리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많이 늙었고 많이 변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고 뜬금없는 현상이다. 한동안 못 봤던 꼬맹이 조카들이 벌써 결혼을 한다는 둥 애를 낳는다는 둥 하는 걸 보면 참 신기하고 놀랍다. 그야말로 변화라는 것을 극적으로 실감하는 순간이다. 어느 정도 심하게 변해야 그것을 감지할 수 있는 둔한 감각 기관 덕에 우리 대부분은 평소에는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산다.
끊임없는 변화의 실체
변화를 체감하는 것은 가끔이지만 변화 자체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변화는 얼마 동안은 아무 일도 없이 있다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10초 동안은 멀쩡히 가만히 있다가 10초 이후부터 갑자기 변한다거나 1년 동안은 아무런 변화 없이 머물러 있다가 갑자기 1년 후부터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변화의 시작은 1년 후 혹은 10년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일어난다. 지금 순간과 바로 다음 순간에 그 변화가 일어난다.
큰 변화는 알 수 있지만 작은 변화는 잘 모르고 넘어간다. 일정 정도의 변화가 눈에 띄기 전까지는 알지 못한다. 사실 우리가 매 순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눈이 변변치 못해서가 아니다. 우리의 눈은 분명 매 순간의 변화를 충분히 감지하고 있지만 우리의 이원적인 생각이 실상을 가로막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눈은 분명히 모든 대상이 변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만 그것이 변함없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뿐이다. 그 해석의 구조가 이원적인 분리다.
이원적인 분리구조 안에서는 모든 것이 따로따로 존재한다. 사과는 사과대로 테이블과 따로 존재하고, 선풍기는 선풍기대로 냉장고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한다. 그렇게 따로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일정한 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그것은 고정적인 것이고 변하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다시 말해서 사과를 오른쪽에 두었다가 왼쪽으로 옮겼을 경우, 우리는 그 사과가 변한 것이 아니라 움직였다고 해석한다. 사과라고 하는 것이 저 밖에 고정적으로 있는데, 우리가 단지 그것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면서 사과가 움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사과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과가 변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대상을 정의할 때 그것의 모양뿐만 아니라 위치도 그 대상의 존재를 판가름하는 아이덴티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바뀐다면 그것은 변한 것이다.
우리가 흔히 길거리에서 보는 자동차는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나 또한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차를 타고 출근하는 모든 움직임이 바로 변화다. 이렇게 변하는 것을 분명히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개별적으로 따로 분리해 놓은 탓에 전체적으로는 변할지라도 그 개별적인 대상은 변하지 않는다, 단지 움직일 뿐이다라고 생각한다. 움직임이 가능한 것은 모두 변하기 때문이다.
A장소에 있는 것이 어떻게 B장소에 있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사과의 모양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가 아니냐고? 이것이 바로 사과와 사과 아닌 것을 분리시키는 우리의 이원적 인식 구조로 해석하는 생각이다. 이 구조의 틈을 보려거든 ‘사과’가 정말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를 내려보는 대단한 도전을 해보는 것이 좋다.
연기법과 변화의 본질
그런데 왜 변할까? 그렇게 변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연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연기적이라서 순간순간 다른 원인과 조건으로 말미암아 변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기적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알맹이가 없으니까 변하는 것이다. 만일 무엇이라도 고정된 무엇이 있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이도 없고, 늙어서 죽는 노인도 없다. 꽃도 피지 않으며, 꽃도 지지 않는다. 해가 뜨지도 않고, 해가 지지도 않는다. 해가 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모든 변화들은 사실은 변화라고 할 주어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착각의 구조는 우리의 이원적인 인식 구조 때문이다.
눈이 변화를 감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변화를 감지하고 있으면서도 고정되어 있다고 착각한다고 해야 맞다. 우리의 눈은 분명 그 변화를 보고 있지만 우리의 이원적인 생각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연기법의 결론이 개별적 존재성의 부재라는 것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존재성을 찾기 위해 정의를 내리고 싶지만, 당연히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기원을 따져보면, 다른 원인과 조건들의 집합일 뿐이고, 그 집합 그대로를 인정하려고 해도 그것 또한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에 손을 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생겨도 생긴 것이 없고 사라져도 사라진 것이 없다. 이 단순한 이치를 확인하고 확신하면 깨어나는 것이다. 의식의 확장이 한 번에 벌어진다.
금강경에서 아무리 꿈과 같고 이슬과 같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노래를 불러도 결코 깨닫지 못한다. 왜 그런지 모르고 왜 그런 인식의 변화가 생기는지 알지 못하면 그저 지식으로만 머물 뿐이다. 지식과 개념은 또 하나의 착각의 틀이고 이원적 구조라서 꿈속의 이야기다. 결론이 아니라 과정이 바뀌어야 한다.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방식은 수천 년 동안 충분히 해왔다. 이성의 기능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다음으로 도약하는 과정은 아이가 자라 성인의 의식을 갖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왜 변할까? 왜 움직일까? 그렇게 뻔히 환영과 같은 모습으로 드러나 있는데 어떤 생각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가? 나라는 생각 너라는 생각 이것이라는 생각 저것이라는 생각, 그 모든 이원적 구조 속의 생각들이 변할 것이 없는데 변한다고 하고 움직일 것이 없는데 움직인다고 한다.
아직도 잘 실감이 나지 않는가?
영상을 빠르게 재생하듯 변화의 속도를 빠르게 돌려보면 실감 날지도 모르겠다. 왜 인식되는 것들이 존재성이 없는지 그 이유가 조금 선명해질지도 모르겠다. 유튜브 타임라인을 빠르게 돌리듯 우리의 삶 100년을 빠르게 돌려보자.
그렇게 100년을 흘려보내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는다. 당신과 나의 고민과 수치 그리고 그렇게나 무거웠던 삶의 무게와 회한들… 우리가 지금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는다. 정말로 아무것도!
언제부터 없었던 걸까? 100년 후? 아니면 바로 다음 순간? 아니면 애초부터?
100년 후에는 없는 것이 지금은 있다? 이런 난센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이원적 인식의 한계다.
이 이야기는 사실 변화의 속도에 대한 주제가 아니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니 인생이 무상하고 세월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변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변한다고 할 그 무엇이 없기 때문에 실상은 변한다는 말도 붙일 수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변한다고 할 수 있을까? 주어가 없는데 동사는 그야말로 빈 말이 돼버린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는 듯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변화하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고 있다고 잘못 보고 있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지만 고정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고 변하는 것이 없지만 변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변화의 속도가 0이 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제행무상이라고 한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물론 있다 없다 이원적 개념을 떠난 존재하지 않음이다.
만일 이 사실을 명확히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깨달음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이원적인 생각 구조에서 시작된다니 참으로 짓궂다. 알고 보면 이 짓궂음 또한 우리가 피워낸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