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회적인 생각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매일 마주하는 현실과 실상의 괴리는 좀처럼 넘기 힘들어 보입니다. 지금 마주하는 현실이 사실은 꿈과 같다고 얘기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석가모니도 50년을 넘게 그러고 돌아다녔지만, 실제로 눈을 뜬 제자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런 가르침은 유별난 생각쯤으로 치부됩니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을 먹기 전까지 그 실상을 전혀 믿지 못했듯이 우리도 그와 비슷합니다. 그 이면을 잘 살펴보면 보편성에 기대는 우리의 근원적인 습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동안 우리가 기대고 있던 대중적인 가치관에 의문을 제기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원의식이 비이원(연기적)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들립니다. 어떤 경우는 마치 사회적 가치를 부정하는 듯 들리기도 하죠. 이 두 이야기가 충돌하면 대부분은 보편적 가치가 승리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수가 인정하는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대표적으로 선과 악에 대한 주제가 그렇습니다. 사회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선 악이 실제로는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하면 대부분은 받아들이기 어러워 합니다. 그동안 자신이 배우고 익혀온 가치와 내려놔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규칙이나 합의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게 오해를 많이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인류가 공유하는 보편성이란 게 있습니다. 도덕적 양심이라는 것도 있고요. 평화를 사랑하는 공통의 가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분명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그건 전 세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보편적 가치의 임시성
그 보편적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개념인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접 예를 드신 <사람을 죽이는 일>로 얘기를 시작해 보죠. 사람을 죽이는 일은 보편적으로 나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이 사람을 살려두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 상황이 생긴다면요? 그 사람을 당장 죽이지 않으면 수천 명이 대신 죽는 상황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때도 살인이란 행위는 여전히 비판을 받아야 되는 걸까요? 우리나라를 침략한 적군을 죽이는 경우는 또 어떤가요?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살아가는 시한부 환자들이 있습니다. 간절히 죽기를 바라지만 스스로는 죽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안락사를 원하는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한 단체도 있고 안락사를 허락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그것이 선인가요 악인가요?
이런 의문들은 언뜻 보면 답하기 어려운 문제 같지만 사실은 매우 간단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의문은 근본적으로 답이 없는 문제, 즉 질문이 성립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물음에 우리가 선뜻 답하지 못했던 이유는 우리의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악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사실 매우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마치 오른쪽이 어디인가… 하고 묻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이 어디긴 어디겠습니까? 우리 각자의 오른쪽이 바로 오른쪽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돌아서기만 해도 그 오른쪽은 쉽게 바뀝니다. 이렇게 연악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착각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혼란과 괴로움이 시작됩니다. 마치 우리는 그런 혼란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철학적 담론들과 고민들이 하나의 전문 분야로 자리 잡은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일반적, 보편적이라는 것은 결국은 숫자의 얘기입니다.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는가입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다고 해서 지구가 평평해지는 건 아닙니다. 보편성은 진실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의 평화와 관계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주변의 생각이 자신과 비슷할수록 안락함을 느끼니까요.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개념이란 건 실재가 아닌 임시로 붙여둔 이름표와 같습니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서로 의존하는 개념이죠. 모든 상대적 개념들이 그렇습니다. 나와 너, 흑과 백, 낮과 밤, 있음과 없음, 컴퓨터와 컴퓨터 아닌 것, 사과와 사과 아닌 것, 밥을 먹다와 밥을 안 먹다... 등등 머릿속에 생각으로 떠오르는 모든 것이 이원적이고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제가 다루는 글의 모든 주제가 바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단순한 주제지만 이 단순한 주제를 통해서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해탈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그렇게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어디 석가모니뿐인가요. 모든 종교의 본래 가르침이 모두 여기서 출발합니다. 비록 전해지는 과정에서 다시 이원적 상상력에 그 본래 뜻이 훼손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본 뜻과 목적은 같습니다. (겉 보기에는 종교라는 것이 신의 은총이나 내세의 행복 혹은 다른 가치를 표방하거나, 다르게 변질된 경우도 많을지언정, 모든 것은 하나의 주제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스로를
의지하기
진실을 보기 위해서는 보편성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해야 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해도 스스로 확인이 안 되면 한낱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불과합니다. 그동안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과연 진실인지 스스로에게 차근히 물어봐야 합니다. 남들이 아니라 자기에게 말입니다. 다수결이 아니라 자기에게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갖고 있는 의문에 대해 제대로 답할 능력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런 능력이 없지만 인간은 있습니다. 인간만이 깨달을 수 있으며, 인간만이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의 이원적 인식 구조에 의해서 해석된 세상입니다. 그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이원성을 벗어나 비이원의 실상을 마주하게 되면 그동안 갖고 있던 모든 의문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아무리 실제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어도 그런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식되는 것들 중에 우리가 ‘존재’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원의식으로 모든 것을 분리로 보는 상태에서는 그렇습니다.
어느 지인께서 약간의 분노와 함께 질문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렇게 따끈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있다는 현실도 ‘진실’이 아닌가요? 모든 것이 꿈과 같다고 하시니 혼란스럽습니다.”
이렇듯 보편성을 벗어나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마주 할 때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너무 말이 안 되니 말입니다. 눈을 뜨지 못했다면, 여전히 이원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면,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믿을 필요도 없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면 됩니다. 자신의 인식 구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 보면 됩니다. 이원적인 인식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시겠다면, 이전 글들에서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원에서 비이원으로 전환이 이뤄지는지, 어떻게 그 과정을 가속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조금 깊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