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에 대한오해
명상이나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소리 중에 하나가 분별심을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워낙 자주 듣는 말이라서 한편으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말 중에 하나다.
분별심은 깨달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분별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구분하는 인식과정을 말한다. 사과와 배를 구분하고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분별이다. 너무 당연한 우리의 일상 의식이다.
그런데 이런 분별을 하지 말라니,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분별없이 세상을 사는 것이 전혀 가능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나와 너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글도 읽을 줄 알아야 사회생활을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깨닫기 위해 일부러 치매라도 걸려야 한다는 말인가? 분별하지 않고 어떻게 세상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분별심에 대한 흔한 오해다.
분별 = 구분 = 쪼개짐
분별은 무언가를 둘로 쪼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엇을 분별한다는 얘기는 대상이 다른 것들과는 구분되어 분리된 상태를 전제로 한다. 이미 쪼개어진 것을 그대로 분별하는 것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실상은, 우리가 분리된 것으로 보는 것들이 알고 보면 분리되지 않은 하나다. 그런 하나를 분리된 것으로 잘못 보고 쪼개어 분별하니,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분별은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인식 과정이지만 문제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있다. 실상은 분리가 없다. 그것을 분리된 것으로 잘못 보는 것이 우리의 이원적 분별 구조다. 다시 말하지만 이원적 분별구조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다만 실상을 모르는 이유로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 괴로움도 스스로 감당할 수 만 있다면 사실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니다.
깨달음은 존재의 실상을 눈을 뜨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온 세상의 모든 것이 진실로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지래 겁을 먹고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엇으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존재의 실상이란 것은 쪼게 진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리된 각각의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스스로 괴로우니, 그러지 말라는 것이 바로 '분별하지 말라'는 말의 의미다. 다시 말해, 분리된 것을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지 않았는데 분리된 것으로 보는 습관을 멈추라는 말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건 그 분리된 것들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실체시 하면서 생기는 고통이다. 실제로 존재한다고 착각하니 분별한 것 중 하나를 취사 선택하게 되고, 그것을 움켜쥐게 된다. 여기서 모든 괴로움이 발생된다.
검은 구슬과 흰 구술을 그 모양의 차이를 기반으로 분별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그것을 실체시 하면서 둘 중 하나를 취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원성(분별)은 다른 말로 '취함(머묾)'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안 취하면 되는 거 아니냐 묻겠지만, 당신이 정상적으로 성장한 사람이라면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분별된 세상, 이원성으로 드러난 세상에서 우리는 분리된 것들 중 적어도 하나는 취하도록 구조화 돼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이런 과정을 가속화시키며, 이 모든 것은 매우 빠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실체적 존재관념 = 착각된 존재관념
실재가 아닌 것을 실제로 착각하는 이것을 우리는 '실체적 존재 관념'이라고 하지만 이 말은 조금 혼란스럽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존재 관념이란 말도 되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느껴지는 존재 관념이라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착각된 존재 관념'이라는 용어가 좀 더 오해의 소지가 적은 용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의 전부인지 알기 위해서는 이성적, 분별적, 이원적 인식 구조의 다음 단계로 진입해야 한다. 그다음 단계는 이성적 이원의식 위에 얹어지는 비이원 의식이다. 그것을 촉구하는 말이 바로 '분별하지 말라'는 식으로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원의식 위에 얹어지는'이다. 이성적인 영역이 리셋되거나 무시되는 것이 아닌, 그것 위에서 발달되는 비원의 영역이다. 예를 들면 이성적 의식이 성숙되기 전의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얼마 전 어느 도반께서 '깨달은 사람에게 세상은 어떻게 보이는지...' 물은 적이 있다. 깨어남이 일어나도 분별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분별심이 사라지는 경우는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자거나 돌에 맞아 혼절을 하거나 혹은 죽는 경우와 같이 비일상적일 때뿐이다. 자연스러운 일상 의식 상태에서 분별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때의 이원적 분별심은 눈을 뜨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을 보이며, 그 눈 뜨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한다. 우리가 갓난아이의 전이성 영역으로 의식적으로 후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혹시라도 생각이 없는 멍한 상태나 판단력이 무기력해진, 그야말로 분별의 기능이 마비된 정도를 공부의 척도로 생각한다면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거나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자주 잊어버린다거나 습관적으로 멍한 상태에 빠지는 걸 즐긴다면 마음공부의 대표적인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다.
분별을 내려놓으라는 말에 무턱대고 칼을 버리기보다는 칼이 뭔지 스스로 규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즉 분별심이 스스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스스로 밥을 떠먹는 능동적인 공부가 가능하다. 무조건 칼을 버리라는 식의 법문은 일시적 방편은 될지언정 좋은 가르침은 아니다.
'그거 분별 아닙니까?'
'분별을 내려놓으세요'
이런 가르침은 이원적인 생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유효한 방편이다. 분별을 내려놔야 스스로의 본성을 보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분별을 통해서 깨어남의 문턱까지 도달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분별은 깨어남의 과정 중에 하나다. 그래서 깨어남은 이원성의 바탕에서 피어난 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원성 또한 비이원의 바탕에서 피어난 꽃임을 부정할 수 없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이 아니라 정작 분별이 무엇인지, 어떻게 스스로 작동하는지를 살펴보는 게 매우 중요하다. 이원성(분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다면 이 과정은 매우 의미 있는 깨어남의 핵심 과정이 된다.
분별을 어떻게 내려놓을까?
이쯤 되면 눈치챘겠지만, 분별은 그냥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머리를 때려 기절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의식적으로 분별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수도 없다. 분별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는 순간, 그것이 또 다른 분별이 되는 구조이기 때문에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무분별은 분별할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모양으로는 구분되지만 실제로는 따로 구분할 것이 없음을 보면 그것이 분별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지개를 보고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 더 이상 그것을 잡아두려고 욕심 내지 않는다. 무지개와 무지개 아닌 것을 분별하지만 그것이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그것이 바로 분별을 내려놓는 것이다. 무지개의 실체를 알면, 분별을 해도 분별이 아닌 것이 되고, 분별이라는 행위 자체도 무지개와 같은 허상이 돼버린다.
이렇게 나와 온 세상의 실상을 아는 것이 바로 깨어남이다. 그 실상에는 분별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뭔가 신비한 다른 차원의 얘기 같기 들리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2600년 전,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 보다 의식이 훨씬 덜 발달했던 당시에도 눈을 뜰 수 있었다면, 그 후 이미 의식의 발달 과정을 겪은 우리들에게는 훨씬 쉬운 미션일 수밖에 없다. 적어도 관심만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