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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가짜인 증거를 대시라!!

6월 25일

3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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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가짜인 증거를 대시라!"

강력한 태클이 들어온다.


불교 공부를 열심히 하던 친구가 나에게 약간의 분노 섞어 질문을 던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떨치기 힘든데, 이런 과격한 얘기만 반복하는 내가 야속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데 스스로도 안 믿어지니 얼마나 답답했을지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그 친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알고 싶다는 욕구만 있고 약간의 호기심만 있을 뿐, 실제로 연기법 공부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나면 절에 가거나 유튜브 법문을 들었을 분, 스스로 깊게 사유하고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누구도 그 방법을 제대로 일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친구에게 있어 나는 단지 친구일 뿐이라서 내가 하는 얘기는 모두 그저 잘난 척하는 얘기일 뿐이다. 안타깝지만 나의 이야기는 그 친구에게 아무런 권위가 없다.


과정을 건너뛰고 결론만 접하면, ‘우리가 보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SF 영화의 소재로는 환영하지만 진실로 받아들이고 삶의 배경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비이성적이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의 미신이다. 이것은 어떤 결론을 무턱대고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갖고 있는 이성적인 능력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은 믿음의 영역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이해'다. 우리의 의식을 크게 이성의 영역과 직관의 영역으로 나눠보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분명 직관의 영역에 가까울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흔한 오해다. 겉보기에는 직관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이성의 영역을 포함하고 넘어선 직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건강한 이성의 영역이 뒷받침이 되어야만 한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바른 편해 즉 정견이라고 한다. 이 바른 이해를 건너뛰면 비이성적 판타지로 전락하고 만다.  


세상이 가짜라는 증거를 한 트럭 갖다 주더라도 보통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원적인 의식 상태에서는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이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하고 깊은 연기사유를 통해 스스로 그 증거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가짜인 가장 핵심적인 증거를 제시한다면, 바로 세상이 모양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모양 자체가 바로 비존재의 증거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드러나고 인식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연기적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연기적으로 드러난 다는 말은 개별적 존재성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연기 방식이 아니라면 모양은 절대 생길 수가 없다. 연기법이 중요한 이유다. 예외 없이 드러난 세상을, 드러난 우주를 몽땅 아우르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고타마 시다르타의 깨달음이다. 없던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러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드러난 모양이 그 자체로 가짜는 아니지만, 그것을 구분 짓고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기 때문에 가짜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당신이 그렇게 바라보는 세상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이지, 드러난 세상 자체가 실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모양을 실체로 착각하면, 모양을 개별적 대상으로 바라보면 그 세상은 가짜다. 그 가짜의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 모든 것은 다시 진짜로 돌아온다. 어디 갔다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러했지만 그동안 잘 못 보고 있었을 뿐이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마주해 온 익숙함 때문이지 사실 이렇게 드러난 모양은 매우 신비하고 또 신비하다. 익숙함과 관념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이미 우리의 눈앞에서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그런 신비한 세상이 날마다 펼쳐지고 있다. 이것도… 이것도… 모니터도 휴대폰도 당신의 머리에 일어다는 생각도 모두 그렇다. 이 신비한 세상과 내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혹은 내가 그 신비한 세상 속에 사는 것도 아니고 나의 본래모습이 바로 그 신비 자체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렇게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보게 하고 본래의 신선함과 신비로움을 우리에게 다시 되돌려 준다.


사과를 베어 물면 사과의 맛이 입 안에서 퍼진다. 그 맛, 어떤 수단으로도 표현이 불가능한 그 맛은, 그 자체로 매우 신기한 현상이다. 글로 표현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없는 그 사과의 맛. 눈앞의 모든 것도 그러한 사과의 맛과 같이 신비한 경험이다. 이런 신비한 경험은 분리된 것 없이 하나의 덩어리지만 그 내용을 분리하고 구분하고 이름 짓고 대상화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이원적 생각이다.


세상이 가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진짜의 세상을 맞이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다. 따라서 가짜라는 증거 역시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일시적이라고는 해도 그것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도움이 되는 힌트로서 활용할 수 있다.


드러나고 인식할 수 있는 모양은 그 자체로 비존재의 가장 명백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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