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은 이원에서 비이원으로의 전환이다. 이것은 색안경을 쓰고 있다가 그것을 벗는 것과 같다. 안경을 쓴 채로 보는 모든 것은 안경에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이 말은 가장 상위에 속하는 마음공부의 대전제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놓치는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경이란 우리의 ‘이원적 의식’을 말한다. 이원적 의식이란 별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 그대로를 말한다. 사과를 사과로 보고 나무를 나무로 보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이 바로 이원적 인식 방식이다. 이 상태에서는 인식하는 모든 것을 따로따로 분리된 것으로 본다. 이것을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아주 당연한 인식 방식에 ‘이원적’이라는 말을 붙인 것은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 다른 것을 우리는 ‘비이원’이라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원과 비이원은 반대인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비이원은 이원을 포함하는 개념이라 이원의 상위 개념이다. 이 말은 이원적 상태에서 벗어나 비이원의 자각이 일어나더라도 분리를 기반으로 하는 이성의 기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직 눈을 뜨지는 못했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이런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전제를 잘 세워두면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문들, 예를 들어 신은 존재하는가,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죽으면 어디로 가는가... 등이 모두 이 안경을 쓰고 보는 관점에서 만들어내는 의문이라는 것을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이 예외 없음이 이 자각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고 힘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눈을 뜨지 못한 채 사는 삶을 꿈속의 삶이라고 하고, 그 상태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단지 꿈속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꿈을 꾸는 동안은 너무나 의미 있고 가치 있던 것들이 안경을 벗고 꿈을 깨는 순간 완전히 다른 의미로 탈바꿈되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일이 벌어진다.
이원이든 비이원이든 모르겠고, 그래서 어떻게 안경을 벗으라는 말인가? 태어날 때부터 써온 안경을 무슨 수로 벗을 수 있단 말인가?
다행스럽게도 이런 고민을 지금 우리만 한 것은 아니다. 기록으로 보면 가장 걸출한 석가모니라는 사람이 이미 2600년 전에 그 방법을 고민하고, 6년을 죽도록 고생해서 답을 얻었다. 당시의 가르침은 몇 백 년 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지다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그것을 우리는 경전이라고 부른다. 그 이후 걸출한 스승들에 의해 공부 방법이 새로 만들어지고, 또한 다른 종교에서도 다양한 비슷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안경을 벗는 방법을 발견해 왔다. 그중 하나가 바로 내가 강조하는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안경을 어떻게 벗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불행하게도 현재 불교에서는 연기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 요즘은 참선이나 화두 혹은 선불교 일색이라 연기법의 입지는 거의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간혹 학자들을 통해서 교학적으로 다뤄지기는 하지만, 깨닫기 위한 수행으로서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불교의 핵심은 연기법이다. 이것은 나의 주장이 아니다.
연기법은 사실 어렵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어렵기도 하다. 연기법을 공부하는 분들을 보면 가장 많이 걸리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상즉상입(相卽相入)'에 대한 부분이다.
말 그대로 하면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 있고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정도로 해석된다.
상즉상입은 서로 지난 시간에 있어서 오늘은 이 '상즉상입'을 한 번 살펴보자.
연기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상즉상입'에 대한 부분을 잠시 살펴보자.
연기법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보면, 연기라는 말은 이것으로 인해(연) 저것이 일어난다(기)는 의미다. 서로 기대어 나타나고 드러난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보통은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렵고 모호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이 모호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이원성에 익숙하기 때문이지 실제로 그것이 어렵기 때문은 아니다. 사과의 맛은 전달하기가 어려울 뿐이지, 그것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것과 같다.
상즉상입을 어떻게 이해할까?
상즉상입(相卽相入), 말 그대로 하면 '서로가 서로에 의지해 있고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연기법 공부를 오래 했다는 분들도 상즉상입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면 그리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알지만 설명이 어려운 경우도 있고 이해가 부족한 경우도 있다. 그동안 연기법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받았는데, 그중 대부분은 상즉상입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니 이 부분을 해결하고 넘어가면 이후의 공부가 매우 수월해진다.
상즉상입이 소화가 안된다는 말은, 그동안 공부해 온 연기법에 대한 이해가 모두 오해라는 말과 같다. 연기법 공부에서 이것은 이해가 되는데 저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없다. 마치 코끼리는 알지만 코끼리 다리는 잘 모르겠다고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상즉'은 어렵지 않은데, 서로가 서로를 포함한다는 '상입'이 언제나 문제다. 전통적으로는 겨자씨 속에 온 세상이 들어있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언뜻 들어도 참 기괴한 말이다. 사과에 태양이 들어있고, 태양에 사과가 들어있고, 나에게 당신이 들어가 있고 당신 안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이런 형이상학적 얘기를 들으면 일단 깨달음은 저만치 먼 얘기로 들린다.
연기법을 표현하는 그림을 보면서 하나씩 살펴보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를 간단한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래 그림이 된다.
흰 바탕에 검은색이라고 볼 수도 있고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도 볼 수도 있다. 여기서 흑과 백의 관계를 잘 살펴보자.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흑이 없으면 백이 존재할 수 없고, 백이 없으면 흑이 존재할 수 없다. 여기에 한 가지 의문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단지 인식의 문제가 아닌가? 흑을 지워도 백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백을 지워도 마찬가지로 흑이 백의 자리까지 채워 존재하는 것 아닌가?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 것 아닌가?
이것이 바로 존재관념이다. 존재관념은 우리의 이원적 의식 구조 안서만 돌아간다. 앞선 글 ‘토모나오’는 우리의 이원적 의식이 어떻게 지속적인 분리를 만들어내는지에 대한 간단한 실험이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안경을 벗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이원적 분리 없이 흑만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흑조차도 없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백이 사라진 흑이라는 것은 결국 비이원을 말하는 셈이고, 비이원의 상태에서는 흑이라는 것은 그 존재성이 사라진다는 말이다. 결국 흑과 백으로 나뉘어 있을 때만 흑의 존재성이 드러나고 마찬가지로 백의 존재성이 드러난다.
이것은 단지 개인의 인식 차원의 얘기 같지만 사실은 아주 깊은 존재 차원의 얘기다. 오늘은 상즉상입이 주제이므로 이 부분은 더 깊게 다루지는 않지만, 이것이 단지 개인적인 인식 차원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만 기억하자.
여기서 상즉상입이란 말이 맞다면, 흑이 백에 들어가 있고 백에 흑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흑은 흑이고 백은 백인데 흑 속에 백이 들어가 있다니,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흑이 어떻게 백에 들어가 있고 백이 어떻게 흑에 들어가 있을까?
이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들어있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무엇이 들어있다는 말은 들어있는 것이 그것을 담고 있는 것의 일부라는 말이기도 하다. 즉, A가 B를 담고 있다고 하면, B는 A의 일부가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B가 A를 구성하는 구성 요건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A에서 B를 떼면 더 이상 A가 아닌 게 된다. 모양이 그대로 비슷하게 남더라도 분명 이전의 A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무엇인가가 들어있다는 말은 그것의 구성 요소로써 필수적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들어있다는 말이 갖고 있는 뉘앙스 때문에 B의 전체가 A에 쏙 들어가 A가 B의 전체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런 식은 아니고, 원인과 조건으로 포함돼 있다는 의미이다.
흑 속에 백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백이 흑을 만들어내는 원인 혹은 조건이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 백이 흑에 들어가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으로서 포함하고 있다는 말이 바로 '상입'의 의미다. 그렇지 않고 물리적으로 흙속에 백이 들어가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소화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렇게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그대로 사과라는 것이 드러나고 나무라는 것이 드러나며, 따라서 원인 따로 결과 따로가 아닌, 원인과 조건 그대로 결과라는 인과동시를 깨닫게 되는 것이고, 인과동시가 이끄는 자연스러운 결론인 이원적 존재감의 소멸과 함께 '상즉상입' 또한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안경을 벗는 과정이 연기법 방식으로 진행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닿아있고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 상즉상입의 관계라는 것은 과연 어떤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 화엄경에서 '상즉상입'이라는 어려운 말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결론을 말하면, 우리의 눈에는 여전히 분리돼 보이는 두 개체가 사실은 다르지 않은 하나라는 말이 바로 '상즉상입'이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다. 우리의 직접적인 관찰의 결과와는 많이 다르지만, 상즉상입을 통해 살펴본 모든 내용은 필연적으로 ‘분리 없음’의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잘 결과야 매칭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쓰고 있는 이원의 안경 때문이다. 안경을 벗고 보면 당연한 것을 안경을 쓴 채로 이해하려니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원성의 안경을 벗고, 지금까지 분리된 줄 알았던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단일함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렇게 '이원'에서 '비이원'으로의 의식의 전환이 바로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직관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이 단순한 깨달음이 몰고 오는 파장은 매우 크다. 그것을 ‘경계’가 무너진다고도 표현한다. 경계가 무너진다는 말은 현상 세계의 모든 경계가 허상임을 발견한다는 의미다. 그것은 나를 포함해 삼라만상 전 우주를 통틀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는 모든 관념의 해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관념의 해체란 이원에서 비이원으로의 전환이다. 그것이 바로 다름 아닌 안경을 벗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