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어릴 적 추억이 꿈만 같다고 느낀다. 10여 년 전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꿈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꿈과 '실제 있었던 일'과의 차이가 그다지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실제로 냉철하게 살펴보면 지금 이 순간에는 10년 전도 없고 어제도 없다. 그런데 생각으로는 10년 전의 나가 쭉 살아서 지금 여기 있는 거 같고 어제의 가족들도 지금 그대로 여기는 이어져 살고 있는 거 같다. 모든 것들이 10년 전에서 지금까지 쭉 이어져 왔다고 여긴다. 나는 10년 전의 나와 동일 인물이고 우리 가족들도 어제와 동일한 가족들이라고 여긴다. 이런 시간 공간적 개념 속에서 지금 우리의 세상이 돌아간다.
세상은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 그렇게 살면서 슬픔이 있으면 슬퍼하면 되고 기쁨이 있으면 기뻐하면 된다. 이 개념의 세상이 그럭저럭 살만하면 깨어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럭저럭 살만한 젊은 친구들은 아무리 호기심이 충만하더라도 깨어나는 경우가 많지 않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거나 삶에 있어서 무지막지한 고통을 앞에 두고 있다면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써 깨어남이라는 것을 찾게 된다.
당신의 삶에서 그러한 시기가 왔다면 오늘 하는 말은 좀 유심히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혹시 모른다. 읽다가 눈을 뜨게 되는 행운이 당신에게 올지도. 단박에 깨어난다는 허풍 섞인 희망보다도 적어도 기존의 개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할 수 있다. 깨어남은 어제나 내일을 일이 아닌 지금의 일이다.
어렵지 않다. 기존의 개념을 훌훌 털어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보면 된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앞서 서두에 던진 그 시간적 개념과 무언가가 이어진다는 개념에 대해서 냉철하게 살펴보는 게 오늘 주제다.
먼저 어제의 그 무엇도 지금 없다는 것을 가슴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해가 가는가? 어제의 그 무엇도 지금 여기로 가져올 수 없다는 점이 동의가 되는가? (일반적인 개념 하에서는 이 말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려운 점은 어제의 그 무엇, 예를 들어 어제 먹으려고 냉장고에 넣어둔 '사과'가 오늘 보니 있으니, '어제의 사과'와 '지금의 사과'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버릇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개념인데, 왜냐하면 머릿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어제의 사과라는 기억에 의존해서 지금의 사과가 어제에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결국은 머릿속의 개념이나 물리적인 세상이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우선은 확장하지 말기로 하자.) 만일 어제의 사과가 지금의 사과와 동일하다 혹은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어제의 사과'가 옆에 있어야만 가능하다. 비교는 기본적으로 두 개를 놓고 비교하는 것이지 지금 존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무엇을 두고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사실 우리의 개념 놀이는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억지의 연속이다. 주로 가상의 개념과 비교하는 웃지 못할 일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무언가가 이렇게 이어진다고 하는 것은 개념이다. 우리는 그런 개념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개념이 개념일 뿐인 것을 알아보면 세상은 정말 특이한 현상이고 그 어느 하나도 당연한 것이 없다. 이것은 사람이 맨 몸으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초능력을 발휘하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기묘한 일이다.
어제의 그 무엇도 지금 없다는 것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시간을 줄여서, 방금 전의 그 무엇도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라. 방금 전의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있고, 내가 그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나의 질문은 '방금 전의 그 무엇이 지금 있느냐'이다. 방금 전의 그 무엇도 지금 이 순간에 갖고 올 수 없다. 당연하게도 방금 전의 그 무엇이 지금 있지 않다는 것. 이것이 확실하다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념 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개념을 붙들어 어제의 그 무엇이 지금 이렇게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여기 어제의 사과가 이렇게 있다고 말하면서 사과를 나에게 들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사과이지 어제의 사과가 아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어제의 사과가 지금 없는데 지금의 사과가 어제의 사과와 어떻게 동일한 사과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뭔가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다고 믿는 것을 '실체적 존재 관념'이라고 한다. 실제로 무언가가 있어서 시간을 따라 쭉 이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이 개념을 안고 사는 것은 우리의 삶의 기본적이 메커니즘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꿉친구와 돌멩이를 아침밥이라고 여기며 먹는 시늉을 하더라도 그 돌멩이가 진짜 아침밥이 아닌 것과 같다. 이 개념 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실체적 존재 관념'이고 나는 이것을 쉽게 '덩어리'라고 부른다. 실제로는 덩어리가 아닌데 덩어리라고 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덩어리라고 간주하고 그 덩어리를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끌고 다니는 것이 개념 놀이다. (참고 : https://brunch.co.kr/@path/552)
냉장고에서 지금 꺼낸 사과는 개념이다. 실체적 존재 관념이고 덩어리다. 그래서 과거라는 개념에서 끌고 와서 지금 손에 들고 어제부터 있었던 사과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념의 특징은 시간을 넘나들고 공간을 넘나 든다. 그래서 개념은 매우 편리하고 유용하다. 그러나 그 개념 때문에 인간은 괴로워하게 되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참고 : https://brunch.co.kr/@path/632)
사과의 모양은 지금 이 순간 똑같이 인식된다. 모양과 감촉과 부피가 인식된다. 그러나 그 인식의 내용이 '사과'는 아니다. '사과'가 아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쭉 이어져 올 방법이 없다. 그럼 사과가 아니고 무엇이냐? 그것은 그저 모양 감촉 부피의 인식 값으로 인식되는 인식의 내용이다. 그것인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 이런 인식 값으로 드러나게 된 현상이지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무엇이 아니다. 사과라는 특정 덩어리로 인식하는 것은 그저 우리의 생각일 뿐이다.
어제의 무엇도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금의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꽤나 급진적인 말이다. 요즘은 이런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지만 예전이라면 단두대에 목이 달아날 정도로 사회의 근간을 흔드는 엄청난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알고 보면 개념 속에서 쿵작을 맞추며 돌아가는 세상이 더 엄청나게 신기한 일이다.
어제의 사과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사과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지금이 어제고 어제가 내일과 다르지 않다. 어제가 지금이었다가 시간이 흘러 어제가 되는 게 아니다. 어제가 지금이었던 그 순간에도 그 지금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선 지금 이 순간 냉철하게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어제의 그 무엇도 지금 왜 존재하지 않을까? 어제는 무엇이고 지금은 무엇인가? 지금은 어떤 순간을 가리키는가? 우리는 왜 무슨 수를 써도 '지금'을 붙들지 못하는가?
어제의 나가 없다면 지금은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당신은 10년 전과 지금의 거리, 어제와 지금의 거리, 그리고 방금 전과 지금의 거리가 모두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안다. 그래서 어제가 꿈처럼 느껴지듯 10년 전도 똑같은 꿈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 10년 후인 미래고, 나는 지금 10년 전의 과거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진실에 있어서는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완전히 뒤집혀 버린다. 비로소 전도몽상이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