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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기술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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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기술이다. 인생의 위너가 갖고 있는 능력이자 기술이다.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조건이 달라도 누구는 행복을 느끼고 누구는 불행한 이유가 그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행복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을 조건에서 찾기 때문이다. 조건에서 찾아보면 몇 가지 중요한 요소들이 보이긴 한다. 돈, 건강, 가족, 인간관계 등,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같은 조건들이 있는 마치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것들을 목표로 열심히 인생을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눈치 빠른 사람들은 낌새를 챈다. 돈이 많으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돈 많은 그 양반이 늙어가는 모습은 꼭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 반면에 가진 게 별로 없는 동네 아저씨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맨날 즐거워 보인다.



돈이야 그럴 수 있다고 쳐도, 건강 같은 요소는 필수 조건으로 보인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이 꼭 있다.


강원도에는 시한부 선고를 받고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한 있는 호스피스 병원이 있다. 대부분은 노인들이지만, 젊은 분들도 간혹 계신다. 당연히 호스피스 병동이라 활기 넘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런데 여기 좀 다른 분이 한 분 계신다. 그 역시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이곳에 왔다. 그런데 이 분은 마치 자신이 30년은 더 살 것 같은 밝은 표정으로 다른 환자들을 위로하며 병동을 돌아다닌다. 그분에게 있어서 병과 죽음은 불행의 요소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보통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보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다수의 생각이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냉철하게 따져보면 그 밑에 가려진 중요한 핵심이 발견된다. 그것은 행복이 조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치 그런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단지 그래 보일 뿐, 사실은 아니다.


행복은 인간적인 가치이다. 다른 동물들이 느끼는 만족과는 범주가 다르다. 인간은 만족을 넘어선 가치로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라서 그렇다. 굳이 동물과 인간의 행복을 구분한다면, 전자는 결핍에 대한 만족이고 후자는 그것을 포함하고 이성적 해석을 더한 ‘충만함’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것은 물리적이고 조건적인 것을 초월한다. 물리적으로 통증을 겪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역으로 행복을 느끼는 경우가 이것을 반증한다. 가학적인 행위를 통해서 심리적인 만족감과 행복을 느끼는 것이 가능한 것이 인간이다. 이것을 단지 예외로 간주하는 것은 큰 실수다. 진리에는 예외가 없다. 육체적 고통과 행복은 사실 그 범주가 다르다.


핵심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선천적인 경우도 있지만, 생각하는 방식을 훈련함으로써 충분히 후천적인 개발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을 주어진 조건이나 원인에 따르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라, 키우고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그럼 어떻게 그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까? 그 시작은 아주 간단하다. 주어진 조건에서 감사를 발견하고 느끼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것이 우선이다.


현재에 감사하라… 어디서 많이 듣던 익숙한 말이다. 이 대목에서 맥이 많이 빠질지도 모르겠다. 뭔가 특별한 방법을 기대했는데, 그저 자주 듣던 상투적인 말이라니. ‘당연한 것’으로 둔갑시려는 당신의 능력은 여기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렇게 조건지어져 있어서 그렇다. 그러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것을 재발견하고 음미할 줄 아는 능력이 바로 행복력이다. 인생의 위너는 이 능력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 혹은 키우느냐 키우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의식적으로 새로운 관점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행복과 깨어남을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핵심이 담겨 있다. 이 능력이 없으면 행복은 일시적인 쾌락으로 끝난다.


이 능력은 자연스럽게 깨달음의 관점과 연결된다. 익숙하고 당연한 것에서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려면 기존에 자신이 갖고 있던 관점에 변화가 필요한데, 그 과정에서 생각의 구조도 서서히 변하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다시 예로 들어보자. 내 아이폰은 구매한 지 1년 정도 됐다. 살 때는 좋았는데 이제는 그냥 당연히 내가 갖고 있는 물건 중에 하나가 돼버렸다. 얼굴을 인식하면 핸드폰이 자동으로 켜지고, 궁금한 것을 입력하면 답을 해 준다. 지구 반대편 소식이 알고 싶으면 동영상도 보여 준다. 과거의 기준으로 보면 이것은 과연 기적이라 할 만하다. 조선시대 사람이 본다면 아마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신이 내려준 마법의 도구, 돈으로는 따질 수 조차 없는 그것이 우리가 매일 쓰는 휴대폰의 다른 모습이다.


이것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면 실제로 그렇게 볼 수 있다. 모양은 그대로지만 더 이상 그냥 핸드폰이 아닌 것이다. 지금으로 본다면 투명 망토나 하늘을 나는 킥보드를 볼 때의 경이로움과 비슷할지 모른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여러분의 손에 투명 망토가 들려 있다. 언제든지 투명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그 신기한 도구가 지금 우리들 손에 들려 있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그 놀라움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으면 된다.


이렇게 관점 이동을 통해서 대상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감할 수 있다면, 그동안 고정관념에 묶여 있던 존재감과 이원적 실체관념의 뿌리가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필연적으로 대상에 대한 정의와 의미를 결코 하나로 특정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를 통해 비로소 고정관념이 무너지고 존재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사실 행복 추구와 깨달음 추구는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그 시작이 달리 보일 뿐, 입구는 하나다. 그 입구를 통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이성적 사유 능력 뿐이다.


세상에 드러나 있는 대상들은 새롭지 않은 것이 없고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다. 또한 어느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자유롭지 않은 것이 없다. 이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다.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에서 새롭고 감사함을 발견하는 것뿐인데, 그게 뭐 어려울 일이 있겠나. 토굴에 들어가 3년 동안 마늘만 먹으라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감사함을 발견하는 능력은 행복을 위한 기술이자, 눈을 뜨기 위한 기술이다. (감사함을 발견한다는 의미는 무작정 감사하는 것과는 다르다.)


물론 집중력은 필요하다. 산만한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으니까. 집중력이 부족한 분들은 황농문 교수의 ‘몰입’이라는 책을 추천한다. 천천히 깊게 생각하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배울 수 있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운 글을 남기고,

좋은 글이 무엇인지 알게해 준 ‘뮌헨의 마리’님을 기억합니다.

https://brunch.co.kr/@mariand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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